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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록/생존일기

20220310_2_고립

by E0 2022. 3. 10.


최근 친구들을 만났다.
일상 속에서 각자 작은 변화들을 맞이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원래 이렇게 소소한 거였지, 하면서 깨닫는 한편 무엇 하나도 와닿는 게 없었다. 웃긴 이야기를 들으면 웃기도 하고, 위로를 해주면 대답하고, 친구들의 고민을 듣기도 하고. 전이랑 똑같은데, 뭔가... 이 모든 게 나와는 상관이 없는 것 같이 부질없게 느껴졌다.

친구들은 소주를 마셨다. 나는 맥주를 먹다가 나중에는 아무것도 마시지 않았다.
친구들이 취해가는 게 보였다. 취한 친구 둘이서 작은 실랑이를 하기도 했다. 나는 조금씩 피곤해지기 시작했다.
술을 안 마시면서 술자리에 있는 건 힘들구나, 당분간 술을 마시지 않을 생각이니 술자리는 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친구들끼리 이번 일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남자친구가 이해가지 않는다고 말하는 쪽과, 이해가 된다는 쪽으로 나누어진 것 같다. 이해가지 않는다 쪽에 있었던 친구의 말로는 한 명의 친구(A) 덕분에 남자친구쪽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수 있었다고 한다. A는 예전에 우울증을 심하게 앓았던 적이 있다. A가 2년 전쯤에 1년 반 정도 기간 동안 만남을 피했던 적이 있는데, 상황이 어떻게 되는지 몰랐던 나와 다른 친구들은 연락이 없는 A에게 서운해하곤 했었다. A는 이제 와서 이야기하는 거지만 그때가 가장 우울증이 심했던 시기였다고 했다. 자취방에서 고함을 지르고, 자기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주로 부모님)을 죽이고 자기도 죽는 상상을 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듣던 다른 친구가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이제는 힘든 일 있으면 말해, 안 그럼 너가 무슨 일 있는 줄도 모르고 걱정하니까."라는 식으로 말을 했는데, A가 "내가 너 걱정할까 봐 말을 해야 하는 거냐"며 되받아쳤다.

아. 싶었다.
그래. 내가 느꼈던 감정이 저거였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내게 "힘들면 연락해"라고 말한 친구들이 정말 많았는데, 그들 중 누구에게도 연락을 먼저 하지 못했고, 안 했던 이유. 어차피 전화해봤자 해결되는 건 없고(해결은 남자친구가 살아나는 거다. 아니면 나도 죽던가) 경험의 특수성 때문에 만족스러운 공감을 받기도 어렵거니와, 말을 꺼내는 나 자신도 너무나 힘이 드는 상황인데 친구들의 걱정과 "내가 기댈만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봐, 내가 진짜 친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봐"라는 서운함을 풀어주기 위해 억지로 전화를 거는 게 괴롭고 싫은 거다.

공감... 특히 이 공감이 문제다. 난 친구들이, 사람들이 내 일에 쉽게 공감할 수 없다는 걸 너무 잘 안다. 일반적으로 공감은 비슷한 경험을 대입한 추측이나 미디어를 통해 습득한 정보를 바탕으로 한 상상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때문에 경험이 적을수록, 사건이 특수할수록 공감은 어려워진다.
내 주변에서 연인과 사별을 한 사례는 내가 유일하다. 인터넷에서조차 나처럼 만나던 중 자살로 사별한 사례를 찾지 못했다. 사건이 이만큼 특수하다 보니 나 자신조차도 내가 처한 이 상황이 무엇이고,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을 무엇이라 정의해야 하며, 난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건지 가닥조차 못 잡아서 혼란스러워 죽을 지경인데 친구들은 오죽할까. 공감은커녕 이해라도 하면 감사한 거다.
(실제 연애 경험이 없는 친구에게 "나는 솔직히 너 남자친구 일이 안타깝긴 한데, 이 일로 너를 자주 못 보게 된 것보다 더 슬프진 않아. 니 남자친구가 나한테 중요한 사람이 아니기도 하고 내가 잘 알지도 못했으니까."라는, 여태껏 들었던 위로의 말 중 가장 매정하면서도 솔직한 말을 듣기도 했었고.)

근데 참 사람이 간사한 게, 친구들이 공감을 못할 거라는 걸 머리로는 납득하면서도 외롭고, 서운한 마음은 또 따로 느끼는 거다. 그래서 "공감 못하는 가짜 친구는 필요 없어!"라고 하듯 주변에 누구도 발을 들일 수 없도록 날을 세우고는 어디 한 번 밟아봐라 쿡 찔러버릴 테니, 하며 유치하게 심술을 부리는 거다.

한 번 물에 빠져 죽을 뻔 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 물에 대해서 느끼는 두려움이 그 비슷한 경험이 전무한 사람들과는 다른 것처럼, 나와 내 친구들 사이에도 그 정도의 거리감이 있으리라 짐작한다.
그리고 사실 이 거리감은 가족에게도 일정 부분 느껴지고, 나 이외의 세상 모든 사물로부터도 느껴진다. 너무 평범한 세상과 나 사이의 이질감이라고 할까, 분리감이라고 할까. 전과 전혀 다른데 여전한 세상이 이상하고 낯설다. 세상 밖의 구경꾼이 된 듯한 이 낯선 시선은 내가 의식을 하든, 하지 않든 항상 어딘가에서 문득, 갑자기 찾아온다.
그럴 때마다 나는 물 위로 떠오른 속 빈 통나무처럼 가라앉지 못하고 그저 물살에 떠밀려 다니며 부유한다.
정말 완전한 고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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